(이직 회고 #1) 첫 퇴사, 그리고 첫 이직

어느 덧, 카카오뱅크 입사 100일이 지났습니다. 신규 입사자 대상으로 하는 회고 세션 '백일썹'을 계기로 이직 과정에 대한 회고를 해봅니다.

(이직 회고 #1) 첫 퇴사, 그리고 첫 이직
오랜만에 다시 보는데 누가 썼는지 모르겠음

퇴사

저는 오랜 기간 (무려 9년) 첫 회사를 다녔습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계속 다녀야 할 지 선택해야하는 순간이 찾아왔는데, 이미 1년 정도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더라구요. 그 생각 하나로 그만뒀습니다.

지난 회사에서의 경험은 좋았다, 나빴다라고 평가할 것 없이 제 삶과 가치관에 전반적인 영향을 준 시간들이었다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20대 전부를 보냈으니까요.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관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지만, 제 선택에는 제 의지보다는 '남들의 선택'이 많이 작용했거든요.

아무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경험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주관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직 준비 시작, 과정

퇴사 후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저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또 막상 어딘가를 놀러갈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일어나서 강아지 산책시키고 멍하게 하루가 지나고 그렇게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신을 갉아먹는 생각을 많이 하고... 누군가 만나면 덤덤하게 근황을 공유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백수 시절. 이제는 주말에나 놀아줄 수 있는 제리.

그러다 해가 바뀌고 누구나 알만한 대형 스타트업의 채용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지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는 초기 기업에서의 경험을 해봤으니, 제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중점으로 조건들을 정리해봤습니다.

  • 비즈니스 모델이 명확하여 돈을 벌고 있는 회사 - 세상에 없는 것에는 없는 이유가 있다.
  • 1000만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지고 있는 회사 - 큰 규모의 사용자를 위한 프로덕트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호기심
  • 10-20명 이상의 안드로이드 개발자가 있는 회사 - 큰 규모의 프로덕트 개발 프로세스에 대한 호기심
  • 엔지니어링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회사 - '나는 개발 업무에만 집중했을 때 얼마나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일까'에 대한 호기심

그렇게 제가 정한 대원칙을 바탕으로 총 4개의 회사를 순차적으로 지원했습니다.

  • 스타트업 (국민 서비스, 흑자, 모바일 퍼스트)
  • 스타트업 (글로벌, 엑싯, 흑자, 모바일 퍼스트)
  • 대기업 (국민 기업(?), 흑자, 수..천명?)
  • 카카오뱅크 (금융업, 1000만명 이상, 모바일 퍼스트, 동료 40여명)

순차적으로 지원한 이유는, 첫 이직이라 경험이 부족해서 병렬로 채용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이 저를 채용하기 위한 맞춤 셀링포인트를 지원서에 녹여봤는데, 이런 노력 덕분인지 모든 서류전형에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지원했던 2개의 스타트업은 모두 1차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자괴감이 많이 드는 시기였습니다. 수 년간 개발을 하면서 1순위가 '일이 되게 한다'라는 목표였기에 이론보다는 동작에 충실했던 것이 단시간에 메워지기는 어려웠습니다.

2개의 면접에서 반복했던 가장 큰 실수는, 남의 말을 빌려 답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단시간에 면접 준비를 하다보니 이런 저런 면접 질문/답변을 검색을 통해 정리하고 준비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지금 그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누가 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을 설명하기 보다는 어디서 본 것을 기억해서 답변하려는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치트키 같은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차근 차근 공식 문서들을 위주로 보면서 핵심 개념들을 제 스스로의 단어와 표현으로 작성했습니다. PPT 슬라이드 당 1개의 개념을 적다보니 어느 새 수백장이 되어있었는데 그렇게 적어두고 반복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대기업 채용 전형은 유일하게 수락한 헤드헌터의 제안이었습니다. 구직 기간동안 정말 많은 링크드인 메시지를 받았는데, 성의 없고 전문적이지 않은 제안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수락했던 제안은 구직자의 이력을 파악하여 '너가 이 포지션에 이러이러해서 핏이 맞을 것 같은데?'라는 명료한 제안이었습니다.

효율적인 채용 의사결정을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1차 면접, 2차 면접까지 하루 만에 보고 인적성 검사까지 마쳤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연봉과 관련하여 떠보는 전화를 몇번 하고 2주 뒤 물어보니 그제서야 불합 통보를 하더군요😇. 대학교 졸업 이전 경력 미포함, 스타트업 경험은 절반만 쳐준다는 등 소위 후려치기 스탠스가 나오니 저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스스로를 갉아먹는 타협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1차보다는 한 스텝 더 나아갔다는 의미 부여를 하던 그 때, 카카오뱅크 안드로이드 하이라이트 채용공고가 올라옵니다.

카카오뱅크 하이라이트 채용

제가 경험한 카카오뱅크의 하이라이트 채용 과정은 많은 부분이 좋았습니다. 합격해서 그런 것 아님 후기처럼 적어보자면,

  1. 카카오뱅크의 일하는 방식, 다양한 복지, 구성원 인터뷰, 기술 세션 등 구직자 입장에서 유용한 정보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문화는 상당 부분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 많이 일치합니다.
  2. 다수를 뽑는 하이라이트 채용이었기에 수시 채용 형태보다는 어느 정도 일정이 정해져있었고, 잘 지켜졌습니다. 여타 경력직 수시채용 공고처럼 기약 없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3. 사전 과제 전형으로부터 이어지는 실무진 면접은 '이거 아시나요? 저거 아시나요?' 물어보는 퀴즈쇼 면접보다 제 강점이 잘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훨씬 유효하게 서로의 핏을 잘 확인할 수 있던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4. 임원 면접을 준비할 때는 '면접왕 XX' 채널을 비롯하여 다양한 면접 유투브를 봤는데, 저한테는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 면접 당시 어떤 질문에 대해 답변을 어떻게 할 지 '제가 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답변' vs '유투브에서 본 정석 답변(?)' 고민이 들던 때 후자를 택해봤는데, 역시 남의 말을 빌리니깐 바로 꼬이더라구요. 바로 다시 의식의 흐름에 맡겼습니다.
  5. 뭔가 과정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떨어졌어도 배운 게 많았다고 생각해야지'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합격의 징표 중 하나가 무슨 신용정보동의 문자 같은게 오는 것인데, 그 문자가 왔던 날이 다시 생각나네요. 삶이 무너지기 직전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어 그저 감사함이 가득한 날이었습니다.

와이프가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낸 것은 앞으로 우리한테 큰 무형의 가치가 될 것 같다' 라고 한 말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곧 큰 혼란에 빠졌는데 '경영진 면접 합격=최종 합격' 이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검색을 해보면 그렇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주변 분들께도 여쭤보니 같은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도장 찍기 전까지는 모른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별 문제 없이 후속 절차가 진행되었고 무사히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험난했던 빙하 트레일 코스. 마테호른을 바로 코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 최종적으로 입사일을 확정했다.

이직 과정에서 배운 점

자나 깨나 본업이 우선

퇴사를 결정할 무렵, '인공지능위크 2023(Google IO Extended)', '드로이드나이츠 2023'과 같은 굵직한 개발자 행사에서 발표도 하고, 많은 개발자 분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혼자 일해왔기 때문에 다른 개발자들과의 교류는 제게 성장을 위한 좋은 영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업이 사라지니까 결국 본업 외 활동들의 효용도 흔들리더라구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듯이, 본업이 튼튼해야 그 외 활동들의 가치와 효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 기간 동안 Compose Internals 번역, GDG Korea Android 운영진 활동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제게는 빨리 본업을 바로 세우기 위한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 할 수 있다 (X) 다 할 수는 없다(O)

'다 할 수 있다' - 벽에 걸어놓았던 네온사인

감사하게도 이직 기간에 정말 다양한 기회와 제안들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본업'이라는 명확한 우선 순위가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다 할 수는 있었지만, 본업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주객전도 상황이 되는 꼴이었습니다. 겸허히 제가 처한 상황에서는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제가 정말 해야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다 할 수 있다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도 습관이 될 수 있다

제 가치관인데, 그 의미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외적인 성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바탕으로 '작은 성공'의 경험을 하고, 그로부터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을 찾아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성공의 경험을 하다보면 어느 덧 정말 동떨어진 카테고리의 일이라도 공유하고 있는 자신만의 성공의 방정식을 찾을 수 있을 것 입니다.

개발자 구직 시장의 한파와 함께한 첫 이직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서류전형', '과제전형', '실무면접', '임원면접', 마지막으로 '처우협의'까지... 모두 처음 해보는 것들일지라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며 결국 또 다른 '성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갈 수록 모두 각자 다른 문제 상황을 겪게 됩니다. 누군가의 조언이 나에게는 정답이 아닐 확률이 점점 높아질 것입니다. 저도 또 어떤 문제를 겪게 될 지 모르지만, 그동안 해왔듯이 어느 정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큰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마치며

요즘 종종 차를 타고 통근을 하고 있는데, 판교의 주차난으로 일출을 보며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출발할 땐 정말 칠흑 같이 어둡던 하늘이 도착했을 땐 밝아져 있는 것을 보며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저는 왠지 저 말이 꽤 와닿아 위로가 되었었는데, 혹시 제가 겪었던 막막함, 어려움을 느끼고 계신 분들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언젠가 꼭 해는 뜹니다.

-이직 회고 1부 끝-